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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경교 발췌의 글
 
 

발췌의 글

 

 

예술이 인간 진화의 완성된 형태라고 말한건 작가 최인훈입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진화과정을 상상속에서 완성해 본 특별한 행위라고. 정신병자와 예술가는 현실에 극도의 불만을 지닌다는점에서 닮았습니다. 정신병자는 불만스런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도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현실적응의 실패를 통하여 오히려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릅니다.

새로운 가치의 건축! 그속에서 예술가는 자신을 갱신하여 현실을 바꿔나가는 진화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오해가 없길! 그 진화가 보편적 타당성이나 인간의 획일화된 욕망을 의미하는건 아니란 것을. 단언컨대, 그것이 문명의 이익이나 발전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말이지요. 예술적욕구는 퇴행을 통해서도 진화를 꿈꿀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술만의 특권이며 생명력인 셈이지요. 요컨대 예술가는 가공할 상상력을 통하여 누구도 헤아리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기도 하지만. 인간 누구나가 쉽게 잊고 있는 세계, 가장 원형적이며 원향적인 세계로 돌아서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이윤숙은 후자를 꿈꾸며 염원하는 화갑니다. 그의 그림세계를 관통하는 가치관을 그래서 나는

소외된 문법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소외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택으로부터 배제된 심리상태이며, 관습적인 전체성이나 유행의 획일성으로부터 벗어나 상황입니다. 모두들 한 켠으로 몰려갈 때 그는 홀로 돌아오는 한 사람이며,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는 외로움속에서 스스로 영글때를 기다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외는 화려하기보다는 초라하며, 풍성하기 보다는 궁색하기 마련입니다.

그의 작품은 비정과 속도가 지배하는 미래가 아닌 우리들이 잊고 있는 원향, 과거의 한적과 인정이 묻어나는 시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아상실이거나 정체성의 혼란이 우려되지도 않는 개방성과는 거리가 먼 감춤과 머뭇거림, 그리고 감성으로 옷섶을 여미는 고요의 미학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꿈꿀 권리가 있습니다. 꿈이라 어떤것일까요.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 현재의 상태를 개선하거나 충족시켜주는 미래. 그렇습니다. 끔은 철저히 미래지향적이며, 보이지 않는 설레임의 빛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현재보다 빛나는 공간이며, 싱싱하고 건강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번 더 성찰해 봅시다. 미래가 반드시 현재를 보상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휘어진 길모퉁이 저쪽과도 같습니다. 언제나 궁금한곳. 그러나 돌아가보면 그쪽 또한 이쪽을 닮은 풍경일뿐입니다. 이쪽의 푸르름이 모퉁이 저쪽에서 갑자기 분홍빛으로 바뀌진 않습니다.

화가 이윤숙의 안목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꿈이 반드시 미래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미래라고 확정해버리는 습성 자체가 폭력일 수도 있습니다. 지나쳐버린 시간과 공간 또한 유토피아일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가 가고 싶은 나라는 비정과 속도가 지배하는 미래가 아니라 우리들이 잊고있는 원향, 이를테면 과거의 한적과 인정이 묻어나는 시공은 아닐까요. 나는 그 마을을 오래된 유토피아, 혹은 낡은 유토피아라 부르고 싶습니다.

새것속엔 유행이 끼어들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낡은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속도가 요구되지도, 자아상실이나 정체성의 혼란이 우려되지도 않는 세곕니다. 그곳엔 달콤한 잠처럼 평화로운 휴식이 깃들어 있습니다.

결국 그의 유토피아는 문명에 등돌린 외로운 주변, 그리고 빛바랜 변두리였던 셈이지요. 그는 그곳에서 내적 결핍을 채워주는 어떤 가능성, 기쁨의 눈을 뜬 건 아닐는지요. 아니 그리움의 구체적인 물증, 무의식속의 아니무스를 발견했는지도 모를일입니다. 나는 그것을 현장성이나 리얼리티한 용어로 대신하길 거부합니다. 그 용어는 아주 상투적으로 그림의 외양을 지칭할 뿐, 화가의 정신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가 왜 그런공간, 그런대상에 집착하는가. 그 심층적 의식과 실존적 상황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부단히 과거를 향해 퇴행하고 있는 한 화가의 내적 열망을 엿본 셈입니다

 

비극의 음악, 비극적인 서정시 시인 셀리에 의하면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비극적인 것일텐데요. 비극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혹시 이윤숙 화백의 그림에서 평화로운 웃음을 보았다면 그건 그 감상자의 몫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의 그림에 스며있는 비극을 읽습니다. 시를 읽듯이 작품의 발상과 심충을 눈여겨봅니다. 중심을 벗어난 주변에 대한 관심, 낡고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 그리하여 과거속으로 미끄러지듯 퇴행하는 자의식을 들여다봅니다. 그런 관점에서만 나는 그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비극일까요. 더 이상 자기자리를 지탱하기 힘겨운 상태. 소외의 그늘속에서 추억마저 녹스는 유행과 광고로부터 외면당하는, 그모든 외로움의 상황을 떠올려봅시다.

그러므로 이윤숙의 평온한 풍경들은 스쳐지날 때에만 행복으로 기록될뿐,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비극으로 등재됩니다. 그의 그림은 비극을 비극으로 인식하는 눈빛들 앞에. 겉이 아니라 안을 성찰하는 사람들 앞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리얼리티란 어느 곳에도 부재하기 때문이지요.

독자여, 사실이라 믿는 그 편견이 우리의 감수성을 묻어버릴 봉분이며, 그 속에 잠길 때. 시와 그림은 결국 닮은꼴만을 양산하리란 위험, 부디 잊지 마십시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창조방법을 모방하는 것이란 사실을! 그것은 그의 앞날이 눈부신 외딴 섬이길 바라는 필자가 화가에게 드리는 주문이기도 합니다.

 

-시인 이경교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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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시인 이경교 발췌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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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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